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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현
돌봄청년커뮤니티 n인분 대표

돌봄이 보통인 세상

돌봄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놓인 어린 돌봄자, 영 케어러(Young Carer)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막막한 상황을 해쳐나가고 있겠지요.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은 곳곳의 영 케어러와 함께 자조모임을 꾸리고, 프로그램과 정책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뒤처지거나 손해 보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지요. 조기현 펠로우는 이 사회가 취약한 사람을 긍정하는 형태로 뻗어나간다면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을 거라 말합니다. 그는 12년의 돌봄 생활을 발판 삼아 오늘도 굳건히 두 발을 내딛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스무 살 때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난 뒤 돌봄청년커뮤니티 ‘n인분’을 시작하셨죠. 직접 소개해 주실래요?

안녕하세요, 저는 글 쓰고, 영상 작업하고, 돌봄 관련된 정책을 제안하고 있는 조기현입니다. 아버지가 당뇨 합병증으로 쓰러지시고 12년째 보호자로 살아오고 있어요. 돌봄자가 된 이후 부당하다고 느끼는 일이 참 많았어요. 보호자 7년 차쯤 되었을 때, 제가 일 나간 사이 아버지가 치매 증상으로 크게 화상 입는 일이 생겼는데요. 그때 돌봄이 온전히 가족 몫이 되어야 하는 부당함에 관해 목소리를 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어떤 활동부터 시작했나요?

돌봄 당사자들을 찾아다녔어요. 청소년기, 청년기에 저처럼 가족을 부양하게 된 사람이 분명히 있을 텐데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사실 이 사회는 아픈 가족을 돌보는 자식에게 효자, 심청이 같은 좋은 이름을 붙여줘요. 그런데 실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거든요. 그러다 보니 더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았겠죠. 주민센터, 대학병원, 청년센터… 안 가본 데가 없지만 영 케어러(Young Carer)는 찾기가 힘들더라고요. 어쩌다 만나게 돼도 안 좋은 이야기 꺼내고 싶지 않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그들이 왜 대화를 꺼리는지는 이해해 보려고 했어요. 먼저, 가족이 아프다는 사실은 자신도 소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타인에게 이야기 꺼내는 게 힘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저도 아픈 사람 앞에 두고 화를 내곤 부끄럽게 생각한 적도 있고,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거든요. 어디 가서 말도 못했죠. 그래도, 어려운 일이지만 누구라도 솔직히 돌봄 이야기를 꺼내주었으면 싶었어요.

정서적인 공감이 필요해서였나요?

그보다 앞선 마음은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어요. 돌봄을 해나가는 사람은 분명히 있는데 세상은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돌봄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죠. 이런 사회도 유지되고 굴러간다는 걸, 저만 힘든 게 아니란 걸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첫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도 또 다른 돌봄자와 연대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거예요. 제 힘든 기억을 솔직히 풀어내면 누군가 그걸 거울삼아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주지 않을까 싶었죠. 다행히 책이 물꼬를 터준 덕분에 돌봄 당사자들을 계속해서 만날 수 있었어요. 그 덕분에 영 케어러 자조 모임을 만들게 됐어요. 이전에는 자조 모임이 사회복지의 한 영역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만들고 진행하다 보니 자조에는 생각보다 훨씬 큰 힘이 있다는 걸 실감했어요. 예상치 못한 심리적인 위안도 많이 받았고요.

자조 모임을 해나가면서 돌보는 활동에도 변화가 생겼을 것 같아요.

많이 변했죠. 돌봄엔 예고가 없어요. 갑자기 돌봄자가 되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요. 그럴 때 자조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거부해 오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돼요. 적응하는 게 가능해지는 거죠. 예컨대, 치매에 걸린 식구가 생기면 많은 가족이 아쉬운 마음에 현재보다 과거를 생각하게 돼요. 그러나 기억을 잃어가는 현재를 똑바로 마주해야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고, 내가 여기서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가 정립돼요. 보태어 이런 상황이 나에게만 일어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돌봄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죠. 저한텐 그게 변화를 만들어 낸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지금 사회가 건강하고 젊은 사람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힘든 거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취약함을 긍정한다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 않을까요?

돌봄의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n인분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죠.

최근에 집중하는 건 ‘영영 케어(Young Young Care)’라는 멘토링 사업이에요. 청년 영 케어러가 아동·청소년 영 케어러를 돌보는 사업이죠. 돌아올 1월부터 멘토 양성 교육을 시작하는데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체가 되어 나의 돌봄 경험을 돌아보고, 다른 영 케어러와 관계를 맺으면서 힘이 되어주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혼자 힘듦을 감내하고 있는 영 케어러 옆에 또 다른 영 케어러가 많아지게 하는 것, 그런 발판과 연결망을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엔 그것이 안전망으로도 작용할 거고요. n인분은 정책을 제안하고 지자체의 정책 간담회를 진행하기도 해요. 문화·기획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하고요. 영 케어러가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고 사업을 꾸려나가는 게 n인분의 목표예요.

n인분 활동 외에도 개인적인 창작 작업을 다수 해오고 있어요. 작가, 예술가, 퍼포머로서 기현 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어요.

첫 활동이 책이었던 건 화자로 직접 목소리 내는 게 중요할 거라 생각해서였어요. 책을 내고는 영상 작업이나 퍼포먼스도 여럿 진행했죠. 얼마 전에도 아버지와 갤러리에서 미장 퍼포먼스를 함께했어요. 저희 아버지는 미장장이셨는데 치매 초기 단계에서도 일을 나가고 싶어 하셨거든요. 치매 증상이라고 생각하고 달랠 수도 있었지만 “나랑 나가 볼래?” 그랬죠. 미장 기술이 사라지기 전에 가르쳐 달라고 하면서 아버지랑 벽돌 쌓는 퍼포먼스를 하게 됐어요. 아버지는 이런 쓸모없는 거 배워서 뭐 하냐고 하셨지만 시작하자마자 콧노래를 부르시는 거예요. 병이 발발한 이후로는 일자리를 잃고 연거푸 술을 마시면서 의욕 없이 살아오셨거든요. 그래서 저랑 하는 미장 작업이 더 즐거우셨나 봐요. 그 모습을 보면서 아프다는 이유로 모든 걸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야겠다 싶었어요. 지금 사회는 건강하고 젊은 사람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가긴 힘들어요. 취약함을 긍정하는 시대가 온다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 않을까요?

이런 이야기가 혹시라도 돌봄이 특정 누군가의 역할인 것처럼 보이게 할까 봐 조심스러워요. 돌봄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남 일처럼 느끼기 쉽거든요. 누구나 서로를 돌볼 수 있고 돌봄 받을 수 있기에 함께 디테일에 다가가자는 의미로 전달되면 좋겠어요.

n인분을 이끌어 가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도 생겼을 것 같아요.

제가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공동체 커뮤니티를 만드는 건 결국 디테일이다.”예요. 함께 이야기 나누는 돌봄자의 마음과 태도, 표정에 얼마나 디테일하게 다가가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존속 여부가 결정되는 것 같아요. 비관적이던 돌봄자가 n인분을 통해 조금씩 밝고 건강해지는 건,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긍정성을 발견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이런 이야기가 혹시라도 돌봄이 특정 누군가의 역할인 것처럼 보이게 할까 봐 조심스러워요. 돌봄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남 일처럼 느끼기 쉽거든요. 누구나 서로를 돌볼 수 있고 돌봄 받을 수 있기에 함께 디테일에 다가가자는 의미로 전달되면 좋겠어요.

“돌봄을 분담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신 적이 있죠. 누구나 돌보고, 돌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요. 상상하는 사회에 관해 조금 더 들려주세요.

‘가족이 아니어도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회가 돌봄을 분담하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돌본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뒤처지거나 손해 봐서는 안 되는 사회를 꿈꾸고 있죠. 앞서 말한 영영 케어 프로젝트가 하나의 해답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돌봄 활동으로 사회생활에 공백기가 생겨도 영영 케어 수료가 경력으로 인정된다면 내가 겪은 고통이 사회적으로 승화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n인분의 비전은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할 수 있는 돌봄 안전망을 만든다’예요. 돌봄이 필요한 사람과 돌봄자, 그리고 잠재적 돌봄자 모두가 연결되는 안전망을 만드는 게 목표죠. 그런 의미에서 올해 연말 모임의 제목을 ‘하든 말든’으로 정했어요. 돌봄을 하든 말든 모두가 와서 편하게 얘기하자는 의미에서요. 하루빨리 돌봄 사회가 당도하기를 바라면서, n인분도 계속 활동해 나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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